레포트, 혹은 발표 흉내내기는 이번주에도 변함없이 진행되었다. 다음주 수요일이 발표일인데다가, 내가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팀발표라서.. 나 하나 때문에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없는 구색을 맞추려고 금요일 밤에 시작한 자료수집은 새벽 3시 경에 끝났고, 자료를 바탕으로 한 문장쓰기는 그 다음 날인 토요일(그러니까 오늘...) 아침 8시경에야 끝났다. 사실 남들은 자료 수집하면 금방금방 써내려가던데.. 난 딱딱하고 논리정연한 문장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런 녀석들을 내밷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비된다. 문장 하나 가지고 1시간을 붙잡고 있었던 적도 있고....
이렇게 시간을 들여 쓴다고 해서 내용이나 논리면에서 괜찮은 것들이 나오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니 더 암담할수밖에..
철야작업의 피로를 풀고자 9시 넘어 겨우 잠들고,, 오후 1시 50분경에 일어났다.
금, 토요일 두문불출의 의지를 보여주기엔 뭔가 답답하여 근처를 산책하기로 결정!!
적당한 온도(23도란다)에, 적당한 바람에, 너무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은 녹음들... 게다가 길을 지나치는 행인도 띄엄띄엄 등장해 주셔서 그 길을 통째로 빌린듯한 착각 속에서휴식의 시간을 만끽했다.
밤새워 뭘 했다는 뿌듯함과 함께, 머리 속으로 그려지는 발표내용의 목차들...
떠오르는 것들 하나하나가 나를 만족시키고 충족시켜 주는, 간만에 스스로가 예뻐보인 시간..
그렇게 30분 정도 걸었을까..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생각인지 동생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냥 걸어보고 싶었다. 녀석이 주말이라서 고향집에 간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고, 그렇지않아도 저번주에 엄마와의 어색한 상황연출이 약간은 신경쓰였기에, 집안 분위기 파악 겸,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하필이면 그 때 나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은 외식중..(직접구워먹는 장어..였단다..쩝쩝)
동생이 혼자인지 아닌지를 확인 후에 전화를 했어야 하는데, 무작정 시작된 이 행동은 묘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그 파장은 나의 감정에만 한하는 것으로.. 난 그 전화 한 통으로 산책에서 집으로돌아오는 길 위에서 계속 울먹여야했다.
나의 미래에 대한 스스로의 비관적인 발언 이후, 부모님과는 묘한 기류가 생성되었고, 그래서 난 최근에 두 분의 전화를 적절히 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피하는게 능사가 아니라고들 하는데.. 감정의 선이 팽팽한 때에는 무조건 피하고 보자는게 나의 신조이기에..(정말 찌질한 신조로구나..ㅠㅜ) 난 나름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전화를 건 그 시점..이 모두가 모여있는 그 시간대라니..
동생에게 향한 나의 전화는 아빠로 넘어갔고, 아빠는 부모의 소식을 적절히 끊고 있는 약간 괘씸한 딸에게 흔하고 흔한.. 부모 입장에서 나올만한 한 마디를 던지셨다.
큰 뜻이 담겨있는 한 마디도 아니었고, 심한 표현이 난무하는 한 마디도 아니었다. 만약 누군가가 나의 옆에 있었다면..[너 그렇게 속좁은 아이였냐?]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난 아빠의 그 한 마디에 너무 서러워졌다. 갑자기 [인생이 이렇게 어려운거였나]라는 고뇌가 시작되면서, 한 인간으로서, 누군가의 딸로서, 누나로서, 손녀로서의 여러 책임들이 순식간에 나의 감정선을 넘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인생.. 쉽게 살고 싶은 사람이다. 고민없이, 염려없이 살고 싶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날로 먹는 쉬운 인생을 희망하는 것은 아니다. 노력 후에 느끼는 성취감이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가 정도는 아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내 인생이 지닌 전반적인 분위기랄까.. 성격이 [苦]라는 하나의 문자로 표현하기에는 조금 가볍다 싶은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최근들어 부쩍.. 왜 이렇게 살기 힘드냐.. 라고 중얼거리는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암튼 자주 그러고 있다. 그럴 때마다 정말 힘겹게 하루하루를 이어가시는 분들에게는 죄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그래도 이렇게 사는건 싫은걸.. 이라는 푸념이 함께 섞여 나와버린다.
오늘 산책 후반부에 접어들어서는 피터팬이 부러워졌다. 나도 어른이 되고싶지 않은데....(법적으로는 이미 어른이지만..-_-) 앞으로 나에게 다가올 많은 책임, 의무, 역할들이 순간 버거워졌다. 가족계획협회에서 일하신 아빠 덕분에 형제라곤 나와 남동생 달랑 둘이라서 부모님의 노후도 책임져야 하고, 나이도 나이이니만큼 결혼도 생각해야 하고.. 대학원 졸업 이후의 진로도 아직 이렇다 할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것 따위.. 생각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걸까.
물론 몇십억 인구 중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고보니 피터팬과 함께, 정말 독자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실천하며 살고있는 지구상의 누군가도 참 부럽더라. 그런데 난 그리 살만큼의 배짱이 없다. 타인의 푸념과 걱정어린 한 마디에 늘 얽매는게 일상인 나인걸.. 그런 내가 주변의 요소를 절대적으로 배제하고 산다는건.. 숨이 붙어 있는 한은 불가능이다. 그렇다고 타인의 소소한 의견 하나하나까지 의식하며 산다는 것도 참으로 피곤한 일이니..
이론, 혹은 경험으로 축적되어 우리가 쉽게 얻을 수 있는 일련의 정보에 의하면, 스스로의 욕구와 주변인(혹은 타인)이 나에게 바라는 요구사항이 다를 경우,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두 입장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골을 좁혀야 한다고 말한다. [대화]라는 방법이 가지는 좋은 효과들을 나도 여러 매체를 통해 접했기에 이 방법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와 의식의 담을 허물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때로는 나를 무섭게 만든다. 나의 의식에 존재하는 그 담은 내가 지닌, 나와 가장 가까운 나름의 보호막인데 그것을 걷어야 한다니.. [대화]라는 방법이 가지는 효과는 알겠지만.. [그 전에 앞서 의식의 쉴드를 잠시 걷어내는 방법도 가르쳐달란말이얏]..라고 외치고 싶다..-_-;;;
하지만 내가 처한 상황이 상황인만큼(그 상황이라 하면 가득찬 나이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대학원 생활 등등..) 나는 아주 다급히 [대화]라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 그래서 부모님과의 의견차는 물론이고, 이제껏 내가 밀어내왔던 주변인들과의 관계정리도 시작해야 한다. (서른이 되기에 앞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조금은 성숙해지고 싶은 욕심의 작용도 있다) 그런데 난 [대화]를 계속 미루고 있다. 아니 피하고 있다. 거쳐야 할 관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음에도 피하고 있는 나는.. 정말 바보 중에서도 바보다.(여기서 작게나마 자기변호를 해본다면, "많은 이들이 알고는 있지만 행동에는 옮기지를 못하잖아.." 정도일까.)
더 이상은 미루면 안되는데...
그게 발표준비, 혹은 과제 레포트라고 해도.. 미루기라는 못된 습관은 정말 다급히 버려야하는 부분인데.. 나는 미친듯이 그것들을 꼭 껴안고 있다.
이런 내가 앞으로 살게 될 인생은 어떤 형태가 될까.
생각할수록 다시금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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